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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사일언] 수의엔 주머니가 없다(조선일보) / 삶의 마지막 정화 작용, 죽음, 죽음을 통해 찾아가는 영원한 삶의 의미,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해피정 2017. 2. 2. 08:18

 

[일사일언] 수의엔 주머니가 없다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출처 조선일보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02/2017020200028.html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난 연말이다.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바쁜 세밑, 왕복 하루가 꼬박 걸리는 지방에까지 오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알게 된 지인들이 죄인을 만들었다고 원망한다. 부친상만큼은 알리는 게 도리라고 했다. 그런 원망을 들으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와 유난히 친했다. 평생 싫은 소리를 안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느리들에게까지 인기가 좋았다. 그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늘 원망과 한숨의 대상이었다. 나는 안다. 살아오면서 온갖 궂은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유산 갈등에서도 아버지는 당신의 형제에게 대폭 양보했다. "장남이 책임만 지고 권리를 포기했다"며 어머니는 두고두고 원망하셨다. 일평생 샌님처럼 곱게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는 요즈음 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버지의 무게는 컸다. 해마다 명절엔 부자지간 산행을 나섰다.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면 무척 행복해 하셨다. 몇 년 전 힘에 부쳐 산행 중단을 선언했을 때 우리 형제는 할 말을 잊었다. 영원한 이별이 가까워 왔음을 눈치 챈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몸을 소진시켜 우리를 키워내셨다. 일과도 바뀌었다. 마당 잔디는 걷히고 고추 묘목이 대신했다. 우렁찬 자목련은 고추밭에 그늘이 진다는 이유로 싹둑 잘렸다. 우리가 불평이라도 하려 치면 가만히 응답했다. "세월이 답이다. 늙어봐라. 꽃보다도 고추·상추 키우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일사일언] 수의엔 주머니가 없다

뜨거운 불이 들어가는 것을 오열 속에 지켜보길 두어 시간, 유골함이 전해졌다. 당신의 마지막을 담은 상자는 놀랍도록 가벼웠다. 선산으로 가는 길, 내 몸에 전해지는 유골함의 따뜻함에 진저리쳤다. 천붕(天崩)이라고 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잠을 설친 새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손에 쥔다. 학창 시절 의미도 모르고 읽었던 책이 왜 위대한 고전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황제가 그토록 강조했던 진리를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늘 문득 깨달았다. 우리 모두 언젠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수의에는 주머니조차 없다.

 

 

삶의 마지막 정화 작용, 죽음

 

세상이 이토록 혼탁해지고

조화롭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인간이 죽음을 제대로

이해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언젠가 한 번은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은 죽지 않는 듯

먼 남의 일로만 생각한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을 자기 것인 양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기에

 

 

떠날 때도 반드시

빈손이 되어 간다.

 

그것은 조물주가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공편한 진리이다.

 

 

따라서 죽음은 삶의 마지막

정화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처 : 향기와 빛viit명상이 있는 그림찻방 P.262

 

 

죽음을 통해 찾아가는 영원한 삶의 의미

 

태어남, 삶 그리고 죽음. 이것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우주의 큰 흐름이다. 들풀이나 곤충과 같은 미물에서 인간 그리고 은하계의 무수한 별들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살고, 죽는 과정을 거친다.

 

그림의 삼각형은 빛을 펼칠 때마다 내 손바닥에 나타나는 형태를 그대로 옮긴 것인데, 단순한 도안이나 상징물이 아니라 실제 이 힘과 함께 하는 특별한 심벌마크다.(그림의 삼각형 :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행복순환의 법칙 P. 209 참고)

 

삼각형의 세 개의 변은 각각 태어남, , 죽음을 뜻하며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 없이 서로 동등하게 맞물려 이어진다. 다시 말해 태어남, , 죽음 중 어느 하나도 더 중요하거나 혹은 덜 중요하지 않으며, 우주는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 섭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삼각형 안에 우주를 뜻하는 큰 원이 존재하고 그 안에 우주로부터 본성을 물려받은 진정한 나’, viit마음을 의미하는 작은 원이 들어 있다. 삼각형 안에 이 원이 들어 있는 것은 우주의 모든 생명 가운데 그 무엇도 태어나고, 살고, 죽는 이 우주의 흐름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선조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삶을 바탕으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생명이 탄생했고, 바로 나는 지금 이 순간 그 소중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유한하며 어느 시점이 되어 한계에 이르렀을 때 죽음을 통해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죽음은 육체를 에게서 떠나보내는 과정일 뿐 끝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몸이 인 줄 알고 열심히 먹이고 입히고 가꾸고 치장하지만, 이 육체조차 때가 되면 와 분리해 떠나보내야 한다. 마치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되듯 내가 한동안 머물러 있었던 몸을 벗어나 또 다른 영역, 비물질의 세계로 넘어간다.

    

죽음의 의미를 알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의미 또한 분명해질 것이다. 어떻게 사는 삶이 의미 있는지, 죽어서 허무하고 한스럽지 않은 삶이란 무엇인지,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죽음을 통해 예수나 부처와 같은 성자들께서 사랑과 자비를 나누거나 베풀 때는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조차 모르게할 것이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무주상보시를 하라고 한 의미를 알게 된다. , 죽음 이후에도 나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줄 진정한 내면의 복은 남에게 과시하거나 드러냄 없이 순수하게 지을 때 쌓이기에 진정한 복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viit은 내 안의 나, 진정한 내가 유래한 바로 그곳에서 오는 힘이다. 따라서 이 힘과 함께하는 죽음은 내 마음의 고향, 어머니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태어나 성장하고 노화되는 일이 인간의 의지가 아닌 자연의 흐름에 따른 것이듯 죽음 또한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 결코 고통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viit과 함께하는 죽음이야말로 이론이나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을 통해 현실에서 직접 체험하는 웰다잉(well-dying)이다.

 

 

출처 :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행복순환의 법칙 정광호(지음) 2013.02.02. 초판 14P. 208~210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아무도 죽음 이후 죽지 않는 비물질인

마음이 가야 할 곳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해가 저물어 날이 어두워지면

모든 생명들은 자신이 왔던 곳,

자신이 쉴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죽음의 그림자가 육체를 완전히 뒤덮게 되면

내 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나인

마음또한 그것이 왔던 곳,

생명근원의 원천으로 돌아간다.

    

우주 중심에서

viit으로 오는 생명원천의 에너지

viit

그곳이 우리들의 마음이 온 곳이다.

 

출처 : 향기와 viit명상이 있는 그림찻방 P. 257

출처 : ! 인터넷 빛명상
글쓴이 : 서유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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